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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는 잊지 말아야 할 2월14일 안중근의사의 사형선고일

 

안중근 의사 출생과 이토 히로부미 사살

 
안중근 의사 (1879년~ 1910년)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 잠입해 한국 침략의 언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어요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세 발의 총을 명중시킨 후 만세를 불렀고,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이때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 (대한 만세!) 를 연호 했다고 합니다 이후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레 송치되었고 여기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동안 6회에 걸쳐 재판을 받게되었습니다.
 
 

재판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안중근의사 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 
라며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본인들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된 재판이였으며, 그 결과는 뻔한 것이였죠 2월 14일 공판에서 안증근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은 언도 받았습니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 는 모친의 말에 따라 안중근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안응칠역사는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이며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내용이라고해요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 싫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본은 허락하지 않았고 자전적 기록인 
안응칠역사를 끝마치고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고 사형집행을 연기하달라고 요구 하였지만  작은 소망조차 들어주지 않고 무시하며 사형을 집행하였고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군하고 말았습니다. 서예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휘호한 많은 유묵(遺墨)이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70년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71번지에 기념관이 건립되었습니다. 

-자료 참고 네이버 지식 백과-

발렌타인데이와 함께
 2월14일 안중근의사의 사형선고일이 더 기억에 남으시겠지만 3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순국날도 잊지말고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중근의사의 손가락 행방

1909년 3월 안중근 의사와 항일투사 11명이 왼손 넷째 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 혈서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썼다.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104111163198

[골목 안 단지동맹] 그 항아리에 단지동맹 증거가 잠들어 있다

1909년 3월 안중근 의사와 항일투사 11명이 왼손 넷째 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 혈서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썼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1910년 8월29일)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1919년 4월1

www.kyeonggi.com

기사 내용을 보면 안중근 의사와 함께 단지동맹의 일원이었던 황병길 선생님의 외손자 박동일웅씨의 증언에서 자른 손가락은 피가 묻지 않도록 기름종이에 싸서 항아리에 넣고 손가락을 자를 때 사용한 도끼, 권총을 함께 묻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북... 즉, 북한에 있기 때문에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다고 하네요ㅜ